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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중관계연구원
작성일 2020-06-12 00:00:00
제목 화가 한낙연을 아시나요?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독립 의지,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한낙연(韓樂然)

김주용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  기사입력 2020.06.12. 15:39:38

 

 

중국 허베이성 우한(武漢)의 유명한 건축물 황학루와 강한관은 수많은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강한관 종루에는 약 70년 전 항일투쟁시기의 조선인 화가 한낙연의 대형 그림을 걸어놓았다. 뜨거운 삶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키며 조국의 독립과 반제국주의 투쟁에 헌신한 한낙연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한낙연(1898~1947)은 지린성 룽징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광우이다. 1914년 즈음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용정 3·1운동(이른바 3.13운동)에서 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했고 제국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국 일본의 탄압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그들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피신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창조파와 함께 활동했다.

 

1924년 2월 경호대 경호위원으로서 프랑스 조계 및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인들과 접촉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1929년 프랑스 리옹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7년 7월에는 파리만보 사진기자로서 일제의 중국침략을 폭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낙연은 우한에 도착하여 동북항일구망총회(東北抗日救亡總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나섰다. 동북항일구망총회는 팔로군 우한 판사처를 책임지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도하에 있었다.

 

이 단체에서는 <반공>(反攻)이라는 잡지를 출간했는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글을 발표하고 잡지의 표지설계와 미술편집을 담당했다. 또 선전사업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기 위해 한커우(漢口)의 세관빌딩에 선전용 대형유화를 걸어놓기도 했다.

 

한낙연은 친중국 외국 인사들과 교섭을 통해 중국 항전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우한에서 통일전선사업을 맡고 있던 한낙연은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적극 도왔다. 1938년 우한이 함락되자 그해 9월 충칭(重慶)으로 활동근 거지를 옮겼다.

 

한낙연의 자취를 찾아 우한으로 가다

 

우한의 8월은 정말 무덥다. 간단히 후난성 면 요리로 점심을 해결하고 우한 국민정부 청사로 향했다. 차는 연강대가(沿江大街)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강안구 중산대로에 차가 들어서자 일행은 마치 1920~30년대 공간에 온듯한 착각이 들었다. 중산대로를 가로질러 남과 북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조계지 건물들이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도열해 있었다. 천천히 차를 국민정부청사 주변에 주차시켰다. 일행은 우한의 뜨거운 맛(?)을 보기 위해 차에서 얼른 내렸다.

 

서양식 5층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우한 국민정부 청사 벽면에는 '우한혁명정부구지'라는 오석(烏石) 표지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런데 1층 입구에 들어서자 의아했다. 과연 이곳이 국민정부 청사 건물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층 양쪽에는 커피숍과 상점이 들어서 있으며, 현재는 호텔 대화반점(大華飯店)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층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비로소 작은 전시실이 일행을 반겼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정부는 광저우에서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북벌과 함께 단행된 조처였다. 북벌에는 한인들의 역할도 있었다. 1926년 무창을 공격하였던 국민혁명군 제4군에는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도 참가했다. 제6군에는 한인 간부 포병영 영장 이검운(李檢云), 부영장 권준(權畯), 부관에 안동만(安東滿)이 대표적 참가 인물이었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북벌이 시작되면서 장교로 참전했다. 이 가운데 권준은 의열단 단원으로서 국공합작의 초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한 인물이었다.

 

국민정부는 1927년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이곳에서 국민당 제2기 3차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대회에서는 반제반봉건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자고 결의했다. 국공합작과 북벌의 상징이었던 국민정부 청사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사적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건물 외형의 웅장함과는 달리 내부의 전시실은 호텔이 주인이고 국민정부 시절의 역사가 손님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도 1996년 전국 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되어 있어 약간의 씁쓸함을 뒤로하고 중국의 인민예술가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화가 한낙연이 활동했던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나섰다.

 

한낙연의 활동지, 우한 국민정부 팔로군 판사처

 

오후 4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차를 중산대로에서 좀 떨어진 장춘가 57호 옆의 공터에 주차하고 팔로군 판사처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담당자에게 조사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곳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한낙연이라는 걸출한 한인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던 그가 활동했던 곳임을 재차 담당자에게 강조하면서 촬영허락을 받았다.

 

우한 국민정부 팔로군 판사처는 국공합작의 산물이다. 팔로군은 판사처를 통하여 업무를 관장하였다. 판사처는 무선 통신기를 설치하고, 중공의 지시를 전달하거나 정치 군사 정보를 수집하였다. 또 왕래하는 당의 인원을 호송하거나 항일군대를 위한 군수물자를 수집·전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낙연은 한국의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룽징에는 한낙연 공원이 조성될 만큼 중국 조선족의 대표 인물이기도 하다.

 

용정의 낙연 공원

 

한낙연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소수민족의 생활상을 묘사하거나 벽화를 모사하며 고고학적 연구를 했다. 또한 유화와 수채화로 농민들의 가난을 험하고 있는 듯 진솔한 모습을 그렸다. 그러한 작품에는 작가의 서민적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한낙연은 1947년 7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이러한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서 지린성 룽징에 낙연공원을 조성했다. 낙연공원에는 기념비와 조각상, 낙연정 등이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관람객이 한낙연을 기억하기 위해 낙연공원을 찾고 있다. 룽징의 명소로 자리잡은 낙연공원, 그곳은 이제 한중 양국 공동항일투쟁을 기억하고 소환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한낙연 공원 ⓒ김주용



[원문]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1211412936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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